고3 생활이 힘들다. 단순히 해야 할 공부가 많아서라거나 대학이 나를 과연 선택해줄까라는 의문 때문에만은 아니다.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짧게는 앞으로의 10년, 길게는 평생 동안 내가 어떤 공부를 하며 살아갈 것인지 결정해 주는 인생의 첫 관문인 만큼, 한없이 불안하다. 공부하고 싶은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10년 동안 의학만을 공부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이런 내 모습이 나약해 보이고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한다.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신입생 때로 돌아가 민사고를 다시 다닐 기회가 생긴다면 그러겠다고 흔쾌히 말할 만큼 말이다. 3년을 강원도 횡성 산골 기숙사에 갇혀 살며 답답하고 힘든 것도 많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없이 많은 퀴즈와 시험 사이사이에 동아리 활동과 소사 나들이와 추억이 될만한 소소한 일탈들(!)을 우겨넣다 보니 그리 나쁘지많은 않은 3년어치의 그림이 완성된 것 같았다. 바쁨 속에서 여유를 찾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공부를 할 때 가장 즐거운지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수학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손꼽히는 수학자가 될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의 두뇌 회전력과 통찰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냥 수학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시간이 나에겐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사실 고등학교 전까지만 해도 법조인이나 외교관을 꿈꾸던 내가 민사고에 입학하며 이과로 전향(?)한 이유도 수학 때문이었다. 그때는 지금만큼이나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생활 내내 마음 한켠에 수학과를 가고 싶다는 꿈을 담아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꿈이 하나 더 생겼다. 의사가 되는 것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꿈보다는 "목표"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의사가 되어서 느낄 수 있는 보람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수입과 생활이 보장되는 의대를 택하기에 그런 보편의 틀에 사로잡혀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것인지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나는 수학과 의학 중 의학을 택한 상황이다. 앞서 말했듯, 아직도 많은 고민이 된다. 행여나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청태산 자연휴양림에 부모님과 잠깐 저녁을 먹으러 갔다. 한창 수능을 준비하랴, 대학 걱정하랴 바쁜 와중에 쉴 수 있어서 좋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나중에 다시 여기 강원도로 와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부모님은 반대하실 것이다. 그분들은 내가 서울에서 "편안하게" 의사 생활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딱히 튀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는, 그만큼 리스크가 없는 평타인 삶. 그런 삶이 부모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인 것 같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불편하다. 괜히 내가 그 "편안함"을 위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문득 청태산에서 저녁을 먹으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평타인 삶"이 뭐길래 내가 꿈을 포기했을까 하고 말이다. 소박하더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민사고 선생님들처럼 나만의 행복을 찾으며 이런 부슬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영원회귀.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다.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으며 접하게 되었다. 해석이야 당연히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겐 매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매 시간을 가장 아름답게 보내라는 뜻이었다. 물론 혹자는 이를 조금 다르게 보기도 한다. 어차피 삶이란 연속적인 매 순간의 반복일 뿐이니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쉽고 가볍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찰나가 지나면 곧 과거에 불과하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살며 마주하게 될 선택의 기로에서 큰 무게감과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나의 선택들이 전부 과거로 전락해 버리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게 살고 싶다. 그런 점에서 이제까지의 나 자신이 부끄럽다.
대학을 코앞에 둔 고3이 회의감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스울 수 있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20기+알파 후배들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들은 꼭 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에게 읽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털어놓고 싶어서라도 말이다. 민사고에서의 3년이, 그리고 그동안 내리는 선택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기회와, 밤이 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풀 내음새와, 노란 뚜껑의 파스퇴르 우유가 아닌 세련된 유색우유가 나오는 것처럼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찾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감사하고 또 감동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계속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학원에 갈 수 없어서, 혹은 수능공부를 많이 할 수 없어서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일지 몰라도, 그런 민사고이기에 보다 솔직한 내 꿈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민사고와 같은 기회가 언제 나에게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평생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이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선택을 내리길...!
ㅠㅠ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박형종 와우 멋있는 글이야! 인생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가장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길목이 고3이 아닌가 싶어, 내가 수학책을 썼을 때 그 책을 가장 많이 산 어른들이 의사선생님들이셨지. 아마 혜원이처럼 자기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수학을 포기하고 의사의 길로 바쁘게 살다가 어른이 되면서 다시 수학이 그리워졌던 것 같아. 수학은 매력적인 학문임에는 틀림없지만 수학을 직업으로 택하기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지. 그렇지만 종종 아마추어 천문가가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듯이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수학을 즐기게 될 수도 있어.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잖아. 누구나 자기가 가지 않은 길,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살게 되는 거야. 그만큼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리는 선택은 자주 일어나고 숙명적이야. 그렇지만 자기가 지금 가는 길을 즐기고 그것이 후회 없는 선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자기에게 있어. 의사로서의 삶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 될 거야. 단지 안정적인 수입이나 사회적인 대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은 인류와 함께 해온 가장 오래된 직업 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을 살렸고, 기초의학 분야에도 수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기여할 일들이 쌓여 있어. 지금은 일단 자기가 한 선택을 믿어. 부모님이 권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그것을 선택한 것은 혜원이야.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예전에 학교에서 미술을 좋아하던 여학생이 자기 고집대로 건축을 진학했지만 적성이 아니라고 싫어하던 의대로 1년 뒤에 다시 진학한 경우도 보았어. 그 학생과 통화했었는데 해보니까 의대도 좋다고 하더라고. 또 하나의 우화가 있지. 지나가는 사람이 스페인의 벽돌공에게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물어보니 "벽들을 나르고 있잖소."하고 퉁명하게 대답했대. 그 사람이 다른 벽돌공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그 벽돌공은 "나는 큰 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라오!"라고 대답했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는 순전히 자기 몫이야. 인생의 행복도 어느 정도는 거기에 달려 있지.
마음의 평화를 찾고.. 즐거운 주말 행복한 공부가 되길 바래~ 2016-10-08 07:25
양혜원박형종 ㅎㅎ우와....이 글 쓸까 말까 고민 많이 했었어요. 자기 선택에 확신도 없이 대학이나 진로를 택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말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처럼 이미 선택을 내린 이상(그리고 그게 제 선택인 이상) 일단은 후회없이 준비해 보려고요!! ;) ㅠㅠ펑펑 놀고 싶은 주말이지만 그럼 공부하러 가겠습니다!!ㅋㅋ 2016-10-08 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