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페이퍼와 스탬프와 빈 종이
교실 인테리어를 해보았다. 그 동안 교실이 썰렁해서 어떻게 꾸며볼까 할까 하다가 가장 좋은 인테리어 소재는 지난 16년간 학생들이 내게 써준 롤링페이퍼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연말에 코팅필름을 샀는데 드디어 어제 롤링페이퍼를 코팅해서 벽에 쭉 둘러놓았다. 다행히 학교에 처음 온 2000년의 롤링페이퍼도 있었다. 그것들을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롤링페이퍼에 가장 많이 적힌 것은 “선생님의 밝은 모습이 좋았다”는 글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항상 재미난 생각이 떠오르면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편이다.
올해는 아침 담임 시간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수학 문제를 내고, 그것을 친구들이 풀어보도록 했다. 2인 1조로 한 팀은 화요일과 목요일에 각자 한 문제씩 내고, 다른 팀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문제를 낸다. 아침 10분의 담임 시간을 스마트폰이나 하면서 어영부영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했더니 수학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고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며칠 전인 3월 2일에는 스탬프를 찍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출제한 학생이 정답자 이름이 적힌 종이에 확인 사인을 하고 내가 스탬프를 찍는 것이다. 다섯 개와 열 개가 찍힐 때마다 적당한 선물을 줄 계획이다. 스탬프는 전에 바다소어워드 상장을 위해서 만들었던 것을 재활용하였다.
우연하게 일어난 한 가지 일은 곧잘 다른 것으로 파급된다. 이틀 뒤에는 담임 시간에 찍어주던 스탬프를 수업 때에도 찍어주자는 생각이 났다. 문제를 푸는 학생들의 열의가 확 달라진 것이 느껴진다. 나도 스탬프를 찍는 것이 꽤 재미있다. 수업 때 활약에 대해서는 온라인으로 바다소에 별기록을 하지만 종이에 스탬프를 찍는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것이 훨씬 감성적이다. 덤으로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이 일기장에 찍어주던 스탬프의 추억도 느껴볼 수 있다.
행복은 꼭 큰돈을 들여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얇은 코팅비닐 속의 롤링페이퍼와 스탬프가 찍힌 종이 한 장에는 많은 행복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혹시 불행한가? 외롭거나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심심하거나 피곤한가? 그렇다면 종이 한 장을 꺼내자. 그리고 종이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보는 것도 좋고, 롤링페이퍼나 스탬프처럼 종이를 매개로 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다. 흰 종이 위에 아무거나 끄적거리다보면 사실 머릿속에 별것이 없음을, 그 한 장을 의미 있게 채우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종이는 그 무엇보다 얇지만 그 무엇보다 두껍고, 그 무엇보다 가볍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우며, 몹시 좁아 보이지만 우주보다도 넓다. 책상 위에 빈 종이를 쌓아놓자. 종이 한 장은 세상에서 가장 싸지만 그 속에 담길 행복은 가장 비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