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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 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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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펜

컨디션이 별로였다. 어제 저녁 동호회 수영이 끝나고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토스트를 먹었는데 카페인 때문인지 또는 밤늦게 쓴 추천서에 대한 감흥이 남아서인지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나마도 오늘 새벽에 일찍 깼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뮤직뱅크라는 음악방송을 보다가 좌식 의자에서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피곤해서 뭔가 창조적인 작업을 할 상태는 아니었다. 아내가 산책을 하자고해서 원주천을 함께 걸었다. 이 동네는 걷기에 좋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날도 살짝 더워서 개천 옆을 걷는 것이 상쾌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다. 대부분은 사실 몰라도 별 상관없는 것들인데 무심코 클릭을 하게 된다. 그 때문인지 머리가 산만해진 느낌이다. 산책하고 나서 샤워를 하다가 종이와 펜을 앞에 놓고 명상하는 시간을 갖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펜을 들고 뭔가를 쓰지 않더라도 하얀 종이 앞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질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서재로 돌아와서 바로 시험해 보았다. 노트북과 텔레비전이 올라가 있는 테이블 말고 그것을 등지고 공부용 책상 위에 종이와 펜을 놓고 앉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금세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꼭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것을 하기 전에 워밍업을 한다는 기분이면 된다.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좋고 그렇지 않고 낙서나 끄적거린다고 해도 괜찮다. 이면지 같이 부담 없는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편안할 것이다. 나는 뭔가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남겨야 한다면 깔끔한 종이에 옮겨 적는다. 이면지에 대충 쓰다가 중요하다 싶으면 깨끗한 A4용지에 다시 쓰거나 20년 전 프랑스 문구점에서 몇 권 사온 손바닥크기만한 스케치북에 정성스레 쓴다. 이 때 종이 한 귀퉁이에 날짜를 적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한 장씩 뜯어서 클리어파일에 꽂아놓는다. 앨범처럼 나중에 넘겨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다만 요즘같은 시대에 온라인의 장점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써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기록할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수정하고, 위치를 편집하고, 붙여넣기로 재활용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 바다소의 메모 프로그램은 오프라인의 종이이고, 바다소의 스토리보드는 오프라인의 클리어파일이다. 나는 자잘한 아이디어는 바다소에 기록하고, 중요한 것은 바다소와 종이에 동시에 다른 스타일로 기록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점을 잘 활용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앞으로는 여러 책상 위에 항상 빈 종이와 펜을 올려놓을 작정이다. 가방에도 종이와 펜을 넣어 다닐 것이다. 인터넷 포털의 자극적인 제목이 사람들이 산만한 곳으로 들어가는 클릭을 유도하는 미끼라면 책상 위의 빈 종이와 펜은 창조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만드는 미끼인 셈이다. 나는 스스로 종이와 펜이라는 미끼를 곳곳에 던져놓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전략이다. 위대한 작업이 때때로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박형종   2015-09-04 (금) 23:56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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