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놀아줘! 어제 토요일은 집에와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낮잠을 잔 다음 평생교육정보관으로 러시아 인형극을 보러 갔다. 우리는 진짜 러시아 사람들이 와서 하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가득 강당을 메웠다. 그런데 극 형식이 러시아 스타일이라는 뜻이었다. 극이 끝나고 시훈이는 시시해했지만, 시원이는 매우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시훈이에게 나도 시원이 나이에 맞는 것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며, 시시하다고 미리 선입견을 가질 게 아니라 집중해서 잘 보면 배울 게 많다고 말해주었다. 그 인형극은 세 사람이 나와서 아홉 가지의 짧은 이야기들을 풀어가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인형 몸에 얼굴만 대신한 발레리나, 택배로 배달된 아주머니 이야기 등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많았다.
저녁은 큰 처제네 가족, 작은 처제와 함께 피스터피자에서 먹었다. 피자를 먹고 북새통에서 책을 잠깐 보다가 집에 도착하니 10시였다.
일요일 아침 여덟 시경 내가 아직 침대에 누워 잠이 막 깨려던 무렵 시원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긴 하루가 될 듯 싶었다.
방문을 열고 나와 마주치자마자 시원이는 "아빠 나랑 놀아줘!"라고, 역시나 내가 우려하던 말을 했다. 그러면서 목에 매달려서는 거실 소파 옆의 코쿤에 던져질 때까지 끌려다녔다. 내가 인터넷을 하려하면 "나도!"를 외치며, 내 노트북과 좌식의자를 빼앗는다. 바다소에 설문을 하나 쓰고는 주니어네이버에서 뽀로로와 여러 애니메이션들을 보았다.
아내가 일요일 치고는 매우 일찍 일어난다 싶었는데, 대전에서 올라온 막네 처제와 내일 제사 때문에 인천에 가는 나에게 새벽시장에서 고구마를 사서 들려보내기 위해서였다. 일찍 일어난 시원이도 데려가는 김에 아직도 꿈 속을 헤매고 있는 시훈이도 깨워서 함께 가기로 했다. 안개가 잔뜩 끼었고 추웠지만 시훈이는 자전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 나는 약간 걱정을 하면서도 허락을 해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면 이제 어느 정도는 자기가 선택할 나이도 된 것이다. 아내는 위험하다고 매우 못마땅해 했지만..
새벽시장에서 아내는 10킬로그램짜리 고구마를 각기 다른 분에게서 세 상자를 샀다. 늙은호박, 배를 각각 5천원치씩 샀다. 시훈이는 조금 늦게 자전거를 타고 안개를 뚫고 나타났는데, 손이 매우 시려워서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을 후회했다. 아닌게 아니라 잠시 카트를 끌고 다니는 내 손도 한기를 꽤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상인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에서 손을 녹이며 잠시 예전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다. 지난번에 아내를 따라 갔었을 때도 새벽시장을 돌아다니며 캠코더로 녹화를 하던 분이 마침 가족이 모두 출동한 것이 신기했는지, 아내를 인터뷰하려 했다. 아내가 도망가자 나를 대신 인터뷰했다. 세수도 하지 않은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아침은 세 종류의 고구마를 시식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에스프레소 마끼야또를 마시고, 아내는 처제네 집으로 가고, 시원이는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 그래서 나, 시훈, 시원은 자전거를 타고 원주천을 달렸다. 이제 시원이도 제법 자전거를 탄다.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긴 했지만, 자전거를 잡은 손이 차가웠다. 그래도 조금만 상류로 올라가니 번잡한 소음은 사라지고 청둥오리 가족들이 얕은 개울가에서 유영하며 물고기를 잡다가 꽥꽥거리는 소리만이 자잔한 물 위를 떠다녔다.
원래는 집 근처의 분식집 빠샤시에서 우리끼리 점심을 사 먹을 생각이었는데, 자전거를 탄 김에 롯데씨네마가 있는 번화한 동네까지 가보기로 했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원이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재미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시원이는 언덕에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면서도 힘들다고는 하지 않았다.
맥도날드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용우동에서 점심을 먹고, 북새통에서 책을 봤다. 나는 어제부터 팀 하포드의 신작 ADAPT를 읽었다. 생물학의 진화론을 경제, 정치, 사회에 응용한 것이다. 아직 앞부분 밖에 못봤지만, 다음 주장이 핵심인 것 같다.
1. 여러가지를 시도하라.
2. 그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결정적인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라.
3. 시도한 것 중의 일부가 실패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므로 실패했다고 하여도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라.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지금 상황이 성공인지(성공으로 가고 있는지), 실패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를 인정하기(확정하기) 싫어한다. 그러다보면 더 큰 실패를 초래하고 결정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자기의 시도가 성공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당한 순간에 손실을 헤지하고 자기의 인생에서 만회할 수 없는 피해를 회피할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본인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습관은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주지만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운 좋게 성공하기도 한다.
어떻든 이것저것을 시도해보는 제도나 사회가 더 나은 진화론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리더는 그것을 위한 다양한 (반대되는) 의견들을 장려해야 하고, 시민들은 그런 리더의 실패를 용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언뜻 가수 싸이가 "창의는 몸에서 나와요. 잡생각하다가 이거다 싶으면 몸을 던져보라는 거죠."라고 인터뷰에서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책을 열심히 읽는데, 아내가 서점에 왔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 두 개를 시켜서 간식으로 먹고, 나와 시훈이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고, 시원이는 아내차에 자전거를 싣고 차를 타고 집에 왔다.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었는데, 졸립다고 늦게 낮잠을 자려 들어가려는 시원이도 붙잡아 둘겸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보았고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저녁을 먹었다. 1박2일 강릉편이었다. 강릉에 가본 지가 오래되었다. 이번 겨울에는 강릉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온가족이 텔레비전을 보고 깔깔웃으며, 관광에 관한 정보도 얻고 하니 일요일의 편안한 저녁이 되었다.
시훈이와 시원이는 이번주 목요일 기말시험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시훈이는 타라덩컨이라는 환타지 소설을 틈틈히 보다가, 자전거 타고, 텔레비전 보고,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백업하고, 노트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생 어깨너머로 같이 보다가, 놀자고 달려드는 동생을 내치고 않고 친절히 카드 게임이나 보드 게임을 하며 놀아주면서 열심히 딴짓을 하였다. 결국 주말 내내 딱 한 시간 공부하였다.
밤 10시.. 시훈이 마저 잠자러 들어가고 나에게 비로소 한 줌도 안 되는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 귀한 시간에 이 글을 쓸까 바다소의 프로그램을 만들까 잠시 갈등을 하였는데, 결국 이 글을 쓰기로 했다. 그때그때 사진을 찍는 편인데, 이렇게 글을 써놓으면 나중에 사진을 보더라도 의미가 더욱 생생할 것이다. 사진은 나중에라도 웹에 올리거나 인화해서 보관할 수 있지만 글은 지금 시간을 내서 쓰지 않으면 곧 내 머릿속에서 너무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쓰다보면 항상 원래 쓰려던 것보다 더 쓰게 된다. 그나마 매거진을 2년 가까이 쓰다보니 조금 쓰는 속도가 빨라져서 오늘은 두 시간만에 쓰는 것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약간의 시간에 바다소 프로그램을 하나 정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어쩌면 바다소 프로그램들과 내가 쓴 몇 권의 책들이 팀 하포드가 말한 여러가지 시도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든 수 십개의 프로그램들은 일부는 성공하나(아직 서비스됨), 대부분 실패한다. 엄청난 노력이 든 프로그램을 폐기할 때는 힘이 쫙 빠지지만 그래도 배우는 것은 있다. 실력은 늘고, 나중에 일부 코드가 재활용되기도 한다.
어떻든 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의 성공과 실패는 궁극적인 관심이 아니다. 마치 단지 산이 있어서 그것을 오른다는 사람과 비슷하다. 재미있어 보여서, 그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것이다.
시원이는 당분간 매일같이 아빠 놀아줘!란 노래를 부르고 다닐 것이다. 시훈이도 짐짓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역시 놀고 싶다는 욕구는 동생 못지 않은 것 같다. 정말이지 어떻게 놀아주는게 좋은 것인지 고민스럽다. 그 동안 귀찮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었는데 이제 집중적으로 그 부분을 연구해보아야 겠다. 아이들이 원하는 놀이 속에 뭔가 정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