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여행을 다녀오면 그 여행을 한 단어로 정의해 놓는 습관이 있다. 그 여행에서 했던 일들, 다녀온 관광 명소들의 이름, 먹었던 음식, 이런 것들은 어차피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이라서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대신 그 여행의 느낌은 되도록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행 자체의 느낌을 한 단어로 남겨놓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그 단어만 들어도 여행의 느낌과 분위기,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라 추억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동해 바다로 떠난 이번 여행은 아무래도 ‘파란색’ 이라는 단어로 남게될 것 같다. 눈이 부시게 파랗던 바다 때문인지, 비가 쏟아질듯 말듯 우리를 약 올리던 시큰한 푸른빛 하늘 때문인지,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눈을 감으면 온통 푸른색만 가득하다. 아, 거기다 커피향도 살짝 섞으면 완벽하겠다. 첫 날 들른 커피 박물관도 참 인상적이었다. 커피 박물관이라고 하길래 커피의 역사나 커피포트의 종류 뭐 이런 것들이나 둘러볼 줄 알았는데, 직접 커피빈을 로스팅한 건 의외였다. 엄마가 예전부터 커피에 관심이 많으셔서 블루 마운틴 같은 이름들은 몇 번 들어봤지만, 직접 커피콩을 볶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커피콩이 채 안에서 적당히 볶아지며 색깔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방 안에 퍼지는 감미로운 커피 향을 맡는 것은, 생소하지만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책상 한 구석에 볶아진 커피콩을 조금 놓아두었더니, 방 안에도 커피 향이 한 가득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다가 아니었다 싶다. 마침 숙소인 망상 오토캠핑장도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있던 덕택에, 3일 내내 지겹도록 바다에서 놀고, 바다 소리를 듣고, 파도를 느꼈던 것 같다. 첫 날 도착했을 때는 파도가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랐었는데, 두 번째 날 아침 바다에 나가보니 파도가 잔잔해져 어제는 물이 가득 차있던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에메랄드빛 수면에 햇살이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친구들과 밀려오는 파도에 살며시 발을 담갔을 때 차가운 바닷물에서부터 느껴지던 그 짜릿한 전율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게 내가 여름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바다에서는 너무나 많은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도, 예쁜 조개껍질 하나도, 갑자기 확 밀려오는 하얀 파도도, 밤바다에서 터뜨리는 폭죽 하나도, 그 날 밤 해변에서 보낸 시간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들이 되어 아직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3일 동안의 여유롭다면 여유롭고, 빡빡하다면 빡빡한 일정 모두를 정말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과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바다로 캠핑을 가서 이토록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흔하겠는가. 첫 날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먹었던 회 한 점의 맛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시원함과 그 상쾌함이 익숙했다. 고향이 포항이라, 어릴 적에는 동해 바다에서 고작 20분 떨어진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집 앞에 있던 포항횟집에서 가족들과 먹던 회의 맛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왠지 모를 익숙함 속에 아릿한 향수도 살짝 묻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많은 감정들을, 소중한 추억들과 인연들을 선물해준 여행이었다. 추억을 담고 잔잔히 유영하는 오랜만의 바다는 정말 반가웠고, 앞으로 민사고에서 보낼 3년 내내 그리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