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2010년 10월 7일. 특별할 것 없는 목요일이다.
그래도 오늘 날씨가 좋아 이 날을 기념한다. 학생들은 중간 시험을 앞두고 퀴즈와 숙제로 바쁘고, 선생님들도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퀴즈 채점하고, 16기 입학전형 준비로 마음이 급하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그 모든 것을 제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수업 시간 이외의 곳에서 학생들과 접촉하는 일이 많이 생겼다.
점심 먹으러 국궁장 쪽으로 올라가려는데 운동장에서 안선호가 목발을 하고 걸어오며 나를 애타게 불렀다. 기숙사까지 차를 태워달라는 것이다. 추석 전 2주 동안 목발을 짚는 고인영을 엄청 열심히 태우고 다녔었다. 그 당시 인영이의 시간표를 아침, 오후로 물어보고 등하교 때나 점심 때는 물론이고 일과 중간에도 민족교육관이나 영어교육관으로 모시고(!) 다녔다.
기숙사로 안선호와 손준호를 태우고 올라가는데 2학년 하수민도 목발을 하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어 차에 태웠다. 학교가 운동을 강조해서 그런지 요즘 농구나 배드민턴,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치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담임학생 희준이와 택민이가 IR시간에 축구를 했는데 제발 다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근데, 얘네들은 다음 주가 중간고사인데 축구에 열심이네..
IR시간에 7편의 학술제 논문을 심사하고 고급물리 숙제를 검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산관 1층에서 노트를 복사하는 김동기를 만나 수다를 떨다가 동기가 달라 붙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동기는 내 교실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논문을 읽는 동안 내 뒤에서 이것저것 책을 뒤지고, 말을 계속 걸어서 결국 한 시간 동안 한편도 읽지 못했다. 이럴바엔 차라리 햇볕을 쬐며 논문을 읽는게 좋겠다 싶어 동기와 함께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다산관 앞 잔디밭에 앉았다. 손등에 앉은 잠자리부터 대학진학까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등을 맞대고 돌아앉고서야 나는 논문을, 동기는 역사 노트를 읽을 수 있었다. 서울대 의대간 상훈이가 동기한테 나랑 가깝게 있으라고 했다는데 오늘은 정말 등까지 맞대고 최대한 가깝게 있었다.
5시 20분이 넘어서 다산관으로 들어가며 동기는 박혜선선생님과 상담을 하러 올라갔다. 다산관을 나서는 조현재를 보았는데 얼굴이 초췌하다. 오늘 공부하느라 아침, 점심을 먹지 않았단다. 그럼 안된다고 이야기 했다. 다산관 로비에서 강명지, 김지민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유호정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계단을 내려와서 또 이야기를 했다. 명지는 어제부터 선생님 중에서 내가 제일 한가해보인다고 꼬집는다. 체육대회 때 찍힌 사진 모델비 내라고 하더니만 만족스러운 눈치다.
이제 더 없겠지 하고 다산관 3층으로 올라가서 퇴근하려는데 손준호가 물리 실험실에서 나오며 저녁 때도 차를 타고 올라간다며 자랑했다. 준호는 축구를 하다가 다쳐 발목에 붕대를 감았다. 점심 때 내가 엘리베이터 빨리 닫으라 했다고 이기적이라고 놀렸었다. 그래서 내가 손가락으로 옆구리 찌르며 잘못했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까지 받아냈다.
퇴근하면서 이런 학생들과 있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잘한 이야기들인데, 지난 11년간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에도 남기지 않다보니 그냥 없는 것이 되어 버려서 아쉽다. 간혹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사랑하고 싶고, 남기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느라고 오늘도 어제처럼 시험문제 내려고 가져왔던 책들을 펼쳐보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이 순간에는 손으로 턱을 괴고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그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