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소 이야기 / 22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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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날이 가물고 며칠 째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고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다. 저녁을 먹자마자 일곱 시 반에 잠자리에 들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억지로 산책을 나갔다. 물이 흐르는 개천 옆을 걷고서는 조금 개운해졌다.

집에 들어와서는 테이블에 독서대를 올려놓고 책을 읽었다. 건축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면 아무 책이나 상관없었다. 그냥 종이책이면 된다는 기분이었다. 디자인이 깔끔한 컵도 가져다 놓았는데 거기에 커피는 들어 있지 않았다. 카페 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그냥 디스플레이 해놓은 것이다. 아내는 깜빡 속아서는 언제 혼자서 커피를 뽑았냐고 말했다.

대충 책을 읽었다. 읽었다기보다는 사진을 훑어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즐거웠다. 몸은 곧 쓰러질 듯이 당장 침대로 가길 원했지만 마음은 책을 보면서 편안했다. 이것이 바로 종이책의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흔히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 등의 전자기기를 써서 뉴스나 블로그를 보고, 전자책이나 잡지를 읽는다. 그런데 이들 전자기기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편안하지는 않다.

나는 오늘부터 저녁 때 종이책과 만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만나고 싶은 것을 잠깐씩 만나면 된다. 책 앞에는 종이와 펜을 놓아두고 그때그때 생각을 스케치하면 좋을 것이다. 노트북도 옆에 두면 궁금한 것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책을 읽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를 데이터베이스에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등 쓸모가 많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하나뿐인 시간을 엔트로피의 바다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쏟아진 물을 다시 컵에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엔트로피의 바다에 빠진 시간은 다시 건져낼 수 없다. 종이책은 엔트로피의 바다에 띄어져 있는 나무배와 같다. 그 배에 타고 있는 한 깊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부터 안전하다. 질서와 온전함을 느낀다. 그 작은 배는 나를 우주 저 끝에서 그 반대편 끝으로 실어날라 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해볼 수 없는 신기한 여행이 될 것이다.
박형종   2015-10-22 (목) 23:23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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