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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그제 금요일은 시원이 생일이었다. 큰 처제 가족, 대전에서 올라온 막내 처제 가족과 함께 마이타임이란 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시원이와 시훈이는 조카들과 그 식당에 딸린 놀이방에서 신나게 놀았다. 다섯 살짜리 여자꼬마가 시훈이랑 소꿉놀이를 하겠다고 우리 테이블에 와서 고집을 부린 것이 웃겼다. 막내 처제 네는 우리 집에서 맥주를 마셨고 시원이는 그 옆에서 이모가 사 준 레고를 오빠랑 조립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오빠랑 안방의 침대에서 깔깔거리다가 잤다. 토요일에는 함께 치악산 자락의 길카페로 가서 점심과 팥빙수를 먹었다. 카페 밖에서 원주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멋있지만 날이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거실 바닥에 앉아 카레밥을 먹으며 무한도전 가요제를 보았다. 현장에서 직접 본 덕분에 방송에는 편집되어 나오지 않은 것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한편 방송에서는 카메라에 클로즈업 된 가수와 멤버들의 모습과 진행과정 등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 조훈현 국수의 "고수의 생각법"을 다 읽었다. 국수란 칭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국수전이라는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란 뜻도 있다. 조훈현 국수는 바둑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룬 분이다. 1989년 4년마다 개최되어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잉창치배 제1회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한국의 바둑 전성기를 이끌었다. 마치 피겨에서 김연아나 축구에서 차범근이 거둔 것과 같은 대성공이었다. 바둑대회 통산 160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세계 최고의 기록으로 바둑 황제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는 중, 고등학생 때 조훈현 국수의 기보를 보면서 바둑에 빠져 살았었고, 그것이 학창 시절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 당시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며칠 전 서점에서 “고수의 생각법”이란 책을 보자마자 바로 집어 들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금씩 읽다가 오늘 일요일이라 한가한 기분으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낮에 혁신도시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책을 읽었다.

책의 핵심은 “고독 속에서 생각하라”는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많은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쓰라림을 겪어 본 사람으로서, 특히 자기가 키운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긴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그의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운전면허증도 없고, 휴대폰도 없이 세상과 크게 부대끼며 산 것은 아니지만 바둑 기사로서 최정상에서 내려오던 시기부터 22년째 홀로 북한산을 등산하며 가다듬은 저자의 내공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을 내서 몇 번 더 읽고 싶은 책이다. 안방 침대에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바로 낮잠에 빠져들었다.

저녁에는 아내가 해준 잔치국수를 먹으며 1박2일을 보고, 원주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등산이나 산책 같은 것을 혼자서 오래 해본 사람들은 종종 경험해보는 것일 테지만 걷다가 가끔씩 생각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처음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머리를 맴돌다가, 주변 건물, 자동차, 사람이나 강아지가 눈에 들어오다가 어느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다. 걷고 있기는 한데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오래 전에 생각했었지만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해답이거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 전에 읽었던 뉴스, 체험했던 것, 뭔가 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다가 무아지경 상태에서 어떤 결합을 이루어내는 모양이다.

그래서 산책은 혼자서 해야 한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지금까지 7년 반째 거의 매일 50분 정도 산책을 한다. 혼자서 등산을 하는 조훈현 국수와 다른 점은 나는 기억력이 별로라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생각난 것을 바로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주머니를 가볍게 하려고 스마트폰 보호케이스를 빼고 본체만 갖고 나선다.

산책은 30분은 넘게 하는 것이 좋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걷고 나서 30분 정도쯤은 지나야만 생각이 없어지는 상황에 접어들 수 있는 것 같다. 이게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그런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건강이나 챙기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운전할 때 이런 상태가 되면 매우 위험하다. 그렇지만 개천을 따라 걸을 때는 안심해도 된다.

요즘 내 생각의 화두는 영원에 대한 것이다. 조훈현 국수가 책에서 말한 레거시(유산)와 같다. 조훈현 국수나 김연아나 “무한도전”을 만드는 김태호PD나 “1박2일”을 만드는 유호진PD나 영화 “암살”을 만든 최동훈 감독이나 또는 어느 누구든 그런 위치에 있거나 어떤 나이가 되면 결국은 그 유산이란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몸과 생각 자체가 우리 조상의 조상의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든 것만을 물려줄 수 있다. 그것이 건축물이나 방송, 영화, 음악, 그림, 글, 제품이나 책이든 생각은 반드시 어떤 모습 속에 담겨져야만 불완전하나마 오래도록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물려주려면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창의성과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박물관에 가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그 비슷한 일들을 항상 하고 있다. 가령 현대의 발명품인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카메라, 자동차, 비행기, 인공위성, 인터넷, 휴대폰, 뛰어난 건축물, 영상물, 음원 등은 훗날 인류의 보물로 여겨질 것임에 틀림없다.

밤이 늦으니 찬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모양이다. 가을은 생각이 더욱 깊어지는 계절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자기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서재에서 생각해본다. "위대한 생각을 하라. 훌륭한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박형종   2015-08-23 (일) 23:54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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