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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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주말이라 푹 자야지 해도 막상 일어나면 7시다. 아내 차를 세차하러 갈까 했는데 밖을 보니 곧 비가 올 모양으로 어두컴컴하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보니 역시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비가 온단다. 나는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세차보다는 산책이 나았다.

개울가를 따라 이곳저곳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을 걸었다. 차분한 분위기가 깔린 늦가을이다. 막바지 단풍 구경을 가려는 차들로 고속도로는 막히는 모양이다. 요즘은 스마트폰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시시콜콜하게 알 수 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아쉬운 가을 풍경을 찍으며 살살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찐빵과 날고구마로 아침을 먹었다. 시원이와 나는 "아빠 어디가"라는 프로그램을 같이 보았다. 그렇게 여행을 가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아이들과 지내는 것은 모든 아빠들의 로망일 것이다. 그것을 방송에서 잘 포착해서 대리 만족을 주는 것 같다.

10시 반쯤 시훈이 자전거를 고치러 나섰다. 시훈이는 펑크난 자전거를 끌고 엄마와 먼저 걸어갔고, 시원이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달려서 뒤쫓아 갔다. 설마 그 사이에 비가 오겠냐 싶었는데 자전거를 고치고 나오니 비가 왔다. 집으로 돌아가서 자전거를 세워 놓고 우산을 들고 산책을 했다.

우산을 쓰고 걸으면서도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나무들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웠다. 내 차를 맡겨 놓은 자동차서비스센터를 들렀다가, 오는 길에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봤다. 마트에는 벌써 빼빼로데이 코너가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시원이는 종류별로 세 가지 빼빼로 과자 봉지를 집었다. 나는 되도록 과자를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빼빼로데이에는 당연히 그 과자를 먹어야 한다는 투로 당당하게 과자를 카트에 넣는 시원이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상술의 무서운 힘이다.

시원이는 집에 다 왔을 때쯤 불현듯 지난번에 내가 다음번 산책할 때 원시 이야기를 이어서 해준다는 것이 생각난 모양이다. 지난번 이야기는 사자를 피해 달아난 원시가 나무 밑에서 낙엽을 덮고 자려고 할 때, 큰 뱀이 원시에게 내려오는 장면에서 끝이 났었다. 시원이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이야기는 강하다.

"원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뱀이 잠에 빠져든 원시를 먹으려고 큰 혀를 날름거리며 원시의 코앞까지 내려왔을 때 누가 도와주었는지 아세요?" "사자요!" "사자는 아니지요" "그럼 누구에요?"

나는 동굴 속에서 잠자던 아빠나 엄마를 생각했지만 좀 더 로맨틱한 이야기를 위해 남자 꼬마를 들여오기로 했다.

"그건 남자 꼬마였어요"

"그 꼬마는 나뭇잎으로 만든 팬티만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감지 않아서 마구 헝클어져 있었어요"

"그 꼬마는 원시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였는데, 힘이 세고 용감했지요"

"멀리 언덕의 풀숲에서 원시가 나무 밑으로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뱀이 원시를 잡아먹으려고 내려오는 것을 보자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어요"

"그 꼬마는 칼로 뱀의 배를 힘껏 찔렀지요"

"뱀은 고통스러워하며 다시 나무 위로 도망을 갔어요"

"꼬마는 원시가 따뜻하게 자도록 모닥불을 피웠고 밤새 옆에서 지켜주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원시는 옆에 어떤 남자 꼬마가 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원시는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

"벌써 집에 도착했네! 오늘은 여기까지~"

"아빠 다음번에 산책할 때도 이야기 들려줘야 해!"

"그럼 물론이지"

"아빠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책하니까 산책이 재미있어"


후다닥 점심을 먹고 아내는 시훈이를 영재원에 데려다주러 갔고, 나는 시원이랑 수리가 끝난 내 차를 서비스센터에서 찾아왔다. 10일 만에 새 차가 되서 내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설거지를 하는데 아내가 왔고, 드립커피를 마시며 빼빼로 과자를 먹었다. 시원이는 거실 좌식테이블에 앉아 도화지에 쓰인 글씨를 다양한 색깔의 물감으로 꾸미고 있다. 엄마가 시원이 학교 연극에 쓰일 소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다. 우연히 창밖을 보니 집 양쪽 베란다 창문들에 예쁜 색을 입은 나무들이 마치 그림처럼 가까이 걸려 있다. 단풍을 구경하러 구태여 먼 산에 갈 필요가 없다.

시훈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이마트를 들렀다. 전기레인지를 구경하고, 제주바다목장에서 올라온 광어를 샀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무한도전-자유로가요제를 보았다. 음악에 문외한이라서 음악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퍼포먼스와 무대 매너, 볼거리와 재미, 감동이 가득한 무대였다.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시원이는 이루마의 피아노곡 river flows in you를 더듬거리며 반 정도를 쳤다. 벌써 몇 달째 어쩌다 생각이 나면 이 곡을 치고 있다. 이제 제법 치는 소리를 들으면 이루마의 곡을 떠올릴 정도는 된 것 같다. 나를 옆에 앉히고는 자기에게 피아노를 배우라고 성화를 부리더니만, 속내는 자기가 그 곡들을 칠 줄 안다는 것을 나에게 자랑하려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아내는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손을 다친 시훈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시원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엄마 잔소리에 거실을 정리하면서 이현세의 "만화삼국지"를 서재로 가져다 놓았다. 최근 들어 아이들에게도 읽힐 겸 나도 시간이 날 때 읽기 위해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와 이현세의 "만화삼국지"를 샀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 그 중의 한 권도 읽지 못했고, 시원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책을 읽고 있다.

짧은 11월의 하루가 이렇게 지난다. 어디선가 외로운 부엉이라도 울 것 같은 밤이다. 천일야화나 해리포터 같은 긴 이야기를 쓰고 싶은 밤이기도 하다. 촛불만 켜놓은 식탁이나 벽난로 앞에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박형종 2013-11-02 (토) 22:34 글 753   답글 프린트 1   ▷3224 폴더 일상[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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