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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고 난 후

(2004.06.26)

책을 쓰고 나서 2달이 후딱 지났네요. 지금에서야 조금 여유를 갖고 지난 일들을 되돌아봅니다.


4월 21일 밤. 필름을 만드는 일이 계속 문제가 생기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학교에 있어야하는데.. 작업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마무리되고 근처 여관에서 2시간 밖에 자지는 못했는지만 새벽 6시 영동고속도로를 내려오는 마음은 홀가분했습니다.


이틀 뒤 필름 교정을 보러 낮에 출력소를 다시 찾으니 2교대 근무하는 출력소의 사람들도 새롭고 마치 딴 세상에 놓인 것 같더군요..

그 한곳에서 8페이지가 한 장에 출력된 필름들을 보았습니다. 혹시 이상하게 출력된 곳이 없나 몇 장을 넘겨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필름을 처음 보아서였는지, 그래서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멋있어 보여서였는지, 아니면 그 얇은 투명한 필름에 담긴 내 청춘의 13년이 아쉬웠는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었는데..


커다란 필름을 한장 넘길 때마다,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지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91년 봄. 잔디밭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즐기던 때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 줄 쓰지도 않아서 갑자기 찾아온 프랑스 유학의 기회 때문에 내 몸보다 더 아끼는 수 백권의 수학, 물리학 책을 남기고 기약없이 떠나게 되었구요..

그 책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머니가 생선을 팔아 한달에 한번 보내주었던 생활비(한달 12만원)에서 방세 5만원을 빼고 남은 7만원에서 무조건 4만원 정도를 책을 사는데 써서 대학 다닐 동안 구입한 것들입니다.


프랑스에 있었던 3년 동안 뒤로 갈수록 책을 쓰고 싶다는 점점 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는데 마치 형체도 없는 어떤 책이 나를 부르는듯 싶었습니다. 나는 오직 박사를 빨리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책에 대한 열정,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와 논문 작성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2번 새벽에 복통으로 쓰러졌고(그때 자기 자식처럼 간호해주신 레만 부인에게 감사), 그 와중에..

94년 겨울. 내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어느 후배가 별이 되어 떠났습니다.



95년 봄. 박사 학위를 마치고 프랑스에 남아서 계속 자기와 같이 연구하자는 지도 교수의 집요한 제안을 뿌리치고,

95년 여름. 강릉대학교 강사로 귀국하였습니다. 1주일에 12시간의 강사 일 이외에는 어떠한 구속도 없었고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책을 쓰며 지냈습니다. 왜 거기서 강사하고 있냐는 눈치도 받고, 몇번 소개 받은 여자들에게도 직업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고, 때로는 방학 때는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또 다시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받아서 연명하기도 했지만 나는 책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그 외의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수를 한바퀴씩 도는 것이 머리를 맑게 해주었습니다.


97년 봄.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구요.. 그곳의 다른 팀에서 비서로 일하던 사람과 가을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99년 봄.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1000권만 인쇄했고, 다 팔았으나 그 후로 더 인쇄하지는 않았습니다. 더 좋은 책으로 개정을 하고 싶었습니다.


2000년 1월 민족사관고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2년 이상을 보냈고, 3년째부터 개정에 착수하여..


04년 봄. 『지혜로운 수학』 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물리학 부분을 완성하는데는 앞으로 7년 정도가 걸릴 것입니다. 그 때도 지금과 같은 희열을 맛볼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그렇기를 바랍니다.


젊은 혈기로 20 대 중반의 대학원 학생 때 생각했던 것을 완성하는데 20 년이 걸리는 셈이네요..



스승의 날에 고대 법학에 진학한 유경이가 학교에 와서 반갑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의예과 학생들과 함께 교양 수학을 들어서 중간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하길래 내 책을 주면서 공부해보라고 했지요.. 며칠전 만났는데 기말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좋아하더군요..

약간 보람을 느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수능이 끝나면 지난 3년 동안 공부했던 책을 버립니다. 과목 당 많게는 십여권의 책을 마치 일회용 종이컵 버리듯이 아무렇지 않게 버립니다. 한권당 만원 정도라면 수십만원어치의 책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려지는 것이 단지 책(또는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불순물)이라면 모르겠으나..

자기 인생의 중요한 3년과 책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박형종 2004-06-26 (토)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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