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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 4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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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식의자

지난 화요일은 결혼기념일이어서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치악산 자락에 있는 피노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가족끼리 가본 적은 오랜만이다. 음식은 사실 내 체질이 아닌데 서비스가 좋아서 갔다. 어떻든 아내가 좋아했으니 된거다.
 
토요일에는 시원이 유치원의 아빠 참여수업으로 백운산자연휴양림에 갔었다. 지난번에는 유치원에서 케이크와 왕관을 만들었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선생님들의 건의로 야외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단다. 늦가을이었지만 날씨가 좋았고, 휴양림을 올라가는 중간에 단체줄넘기 같은 게임도 하고, 손수건 위에 그림 그리고, 마이쮸 따먹기 게임하고, 엄마와 오빠가 쓴 편지 찾아서 읽고, 기념 촬영하고, 내려오는 길에 컵라면을 먹는 것으로 가벼운 산행겸 나들이를 마쳤다. 우리는 가족 모두가 참여했다. 시원이는 아빠와 걷는 것보다는 6살짜리 남자 애와 뛰어다니고, 같은반 여자 친구와 함께 춤추며 신나게 놀았다. 만약 다른 가족처럼 달랑 둘이서만 왔으면 나 혼자 심심할뻔 했다.
 
오늘은 집에서 낮잠도 자고 쉬었다. 아침먹고 노트북을 텔레비전에 연결하여 영화를 보았다. 며칠동안 노트북과 텔레비전을 연결하는 방법을 끙끙대다가 드디어 어젯밤에 성공했다. 케이블이 문제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형태의 4개의 케이블 중에서 단 한 개만이 노이즈없이 깨끗하게 연결되었다. 며칠전에 2개의 케이블이 실패했을 때는 방법이 잘못된 줄 알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비용이 몇 십만원이나 들어야만 되는 것이었다. 간혹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법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수단이 허술해서 실패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1박2일에서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씨와 강호동씨의 20년만의 씨름 대결을 보았다. 승패를 떠나 너무 흐믓한 장면이었다. 당시는 씨름이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중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본인들도 안타까울 것이다. 20년의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다. 화려한 빛과 상상력이 풍부했던 개막식을 유준네와 함께 집에서 밤 늦게까지 보았다. 500억원 들였다는 그 개막식을 통해 중국은 다시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음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20년의 세월은 여기에도 스며 있었다.
 
1박2일을 보며 배달시킨 치킨을 먹고, 8시 뉴스로 아시안게임 브리핑을 보고, 서재로 들어와서 좌식의자에 앉아 밀린 신문을 읽고 물리책을 보았다. 좌식의자가 책을 읽고, 쉬면서 생각을 하기에 편하다. 그래서 얼마전에 4만원 주고 시훈이 것도 하나 샀다. 내 것은 3단으로 등받이 각도가 조절되는데, 새로 산 것은 12단계로 조절된다. 그 동안 시훈이 방에 놓여져 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시훈이가 서재로 들고 와서 내 옆에 놓고 앉았다.
 
신문을 읽다가 그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시훈이를 보았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기사를 읽어서 그랬는지, 73가지의 꿈을 하나하나 실천한다는 사람의 기사를 읽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냥 나와 비슷한 좌식의자에 앉아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시훈이의 사진을 찍고, 아내를 불러 우리들의 모습도 찍어달라고 했다. 600년전의 메디치 가에 대한 신문 기사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머물게 한 것은 당시 그 사람들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 한점이었다. 그 얼굴에서 흥망성쇠에 얽힌 비밀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20년쯤 뒤나 600년쯤 뒤에 이 사진들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인천의 어머님께 전화드렸는데, 누나가 30년 동안 데리고 살던 조카가 최근 결혼 2년만에 분가하였단다. 그래서 누나가 많이 외로운가 보다. 지금은 아내가 짜증을 내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가 많지만, 곧 이런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내가 곧 그렇게 된다고 해도 당장 자기 성질을 못 참고 큰소리를 한다. 
 
나도 잔소리를 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거릴 때가 많은데 조금만 기다려보자며 마늘 100개를 먹은 곰의 신공을 발휘한다. 그러면 정말 잠시 뒤에 아이들이 내가 하라고 말하려 했던 것을 스스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좌식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시훈이의 모습 덕분에 오늘 이런저런 글을 쓰게 되었다. 귀찮아서, 피곤해서, 다른 할 것이 있어서, 쓸게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어, 부끄러워, 시간이 늦어서, ... 글을 쓰지 않을 핑게는 항상 넘쳐난다. 일요일을 마감하는 직전까지도 그랬었다. 내가 사진을 찍고, 웹에 올리는 것도 노력이 들기는 하지만, 없는 솜씨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쓰고 나면 뿌듯하다. 오늘 남기지 않으면 내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박형종   2010-11-15 (월) 00:35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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