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종
2470 1
4191343 1
가입 2007-12-23   69 1
5  
메모 12393   2
일정 16
할것 1   50%
시간 2456시간 45 4

 
바다소? 이야기 사이언스 명언 북마크 좋아요 메뉴
박형종 (905)박시훈 (82)박시원 (76)이순정 (12)강승우 (7)황동욱 (7)김주영 (6)우재현 (5)양혜원 (5)김지수 (3)윤가람 (2)조선우 (2)박준성 (2)정동현 (2)김하경 (2)조연수 (1)
작은 이야기 (1164) | 쓰기
> 추석 여행 일상 09-15 박형종 143
> 8월의 마지막 날 일상 08-31 박형종 181
> 과학자의 논문과 윤리 생각 08-24 박형종 244
> 오랜만의 휴식 [4] 08-17 황동욱 203
> 최고의 휴가 여행 08-09 박형종 161
[1][2][3][4]5[6][7][8][9][10] ... [233]  

최고의 휴가













날이 덥고 습해서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고 있다. 그래도 앞뒤 베란다 양쪽으로 나무들이 울창해서 숲속 펜션에 있는 것 같아 답답하지는 않다.

어제 강릉 경포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이 점심 먹는 것으로 시작해서,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저녁 먹는 것으로 끝났다. 햇볕이 뜨거워서 어디 걷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에 시훈이가 2학기 수강신청을 끝내자마자 10시 반에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바로 강문으로 가서 《해파랑》이란 물회전문점에서 물회 정식, 게살비빔밥, 오징어순대를 먹었다. 지어진지 3년 남짓 된 식당이 깔끔했고 2층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온 기분에 한껏 들떴다. 그런데 강문이 예전의 강문이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허름한 단층 횟집 몇 개가 바다를 향해 늘어선 호젓한 해변이었는데 어느새 커다란 건물들이 즐비하고 차들이 겹겹이 주차된 유명 관광지로 변했다. 나 같은 뜨내기야 와~ 엄청 변했네! 하고 감탄하는 정도겠지만 토박이들은 정든 곳이 없어지는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게를 나와 해변의 반지 조형물 앞에서 얼른 사진만 찍었다. 그리고 달달한 것을 먹으러 테라로사로 출발했다.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은 호수 외곽의 정감 있는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 나지막하고 멋진 카페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폭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개천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나중에 이곳에 아지트를 마련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대 강사로 일할 때 일부러 자전거로 호수를 끼고 달리곤 했다. 책을 쓰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불투명한 미래를 잊게 할 정도로 경포호수의 바람은 상쾌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았다. 내 눈도 자전거도 내 몸도 흠뻑 젖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수를 달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

테라로사에서 여러 시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전망 좋은 2층 창가에 놓인 소파에서 잠시 졸기도 했다. 풍경도 멋지고, 현대적인 시멘트 건축물과 인테리어도 훌륭해서 하루 종일 머물고 싶었다. 다만 디자인과 예술에 관한 많은 책들이 비닐에 쌓여 인테리어용으로 꽂혀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테라로사는 십여 년 전 강릉 구정면에 아담하게 있을 때부터 다녔었는데 양평, 제주, 서울 광화문 등 점점 더 크고 세련된 공간들로 발전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렇지만 가끔은 커피 마대자루가 수북이 쌓여 있고 한 쪽에 로스팅기계가 놓여 있던 옛날의 테라로사가 그립다. 훨씬 작고 테이블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살짝 어두운 공간과 노란 조명이 정감 있었다.

테라로사를 나와 차가 주차된 도로를 걷다보니 옆에 눈에 띄는 건물이 있었는데 《초당타르트》였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서 타르트를 몇 개 샀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즉흥적인 이벤트다. 저녁은 세인트존스호텔에서 뷔페로 먹었다. 대게와 달팽이 요리가 나오고, 디저트들도 맛있었다. 뷔페는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휴가지에서는 호텔 뷔페를 한 번쯤 먹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화초에 물을 뿌리고, 식빵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는 릴렉스체어에서 비실대다가 안방에 들어가서 다시 잤다. 11일 동안의 캠프와 강릉 여행의 여독 때문인 것 같았다. 낮에는 간단하게 찐만두로 점심을 먹고, 시훈이와 함께 갤럭시노트10을 구경하러 삼성디지털프라자에 갔다. 좋은 제품이지만 지금 멀쩡히 잘 쓰고 있는 갤럭시6플러스에서 바꿀 이유는 없어 보였다. 저녁에는 프로젝터로 영화 《매트릭스》를 보았다. 5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인데 몇 번을 봐도 재미있다. 120인치 스크린 맞은편에 쪼르륵 놓인 릴렉스체어와 1인 소파, 시원한 에어컨 바람, 빵빵한 사운드 덕분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매트릭스의 레오처럼 인류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잠시 세상에 대한 사명감을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는 것도 삶의 활력을 위해 필요하다. 중요한 점은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쓰는 것이고, 마치 레오가 프로그램을 통해 업그레이드되듯이 그 과정에서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균형이다.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가끔은 용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다시 주말이다. 다행히 휴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레만 부인이 프랑스 브르고뉴에 있는 그녀의 돌아가신 아버님이 남긴 집으로 초대했을 때 최고의 휴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가족 별장으로 쓰이고 있는 그 집에서 맨발로 마당을 돌아다녔다. 포도주로 유명한 동네답게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집집마다 자기가 담근 포도주와 소시지를 권했다. 참으로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키가 허리춤 정도인 포도나무가 끝없이 심어진 언덕들을 드라이브 했고, 포도주박물관도 구경했다. 저녁은 포도주와 샐러드가 곁들여진 프랑스식 코스 요리였다. 너무 많이 마신 포도주 때문에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25년이란 시간 속에서도 그리운 얼굴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그대로 생생하다. 비행기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순박한 사람들과 맨발로 천천히 지내는 것, 그렇게 남은 휴가를 즐기고 싶다.
박형종 08-09 (금) 23:51 글 1484   답글 프린트 1   ▷161 폴더 여행[20]





 
꿈을 이루는 바다소
가입
아이디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