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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업


설 연휴 마지막 날이라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저절로 눈이 떠져서 알람시계를 확인해보니 6시 반이었다. 명절에 인천과 금산에 가느라 맞춰놓은 7시 20분 알람보다 이른 시간이다. 살짝 짜증이 날만도 했지만 오히려 쓰던 글을 마무리하기에는 좋은 때라서 기꺼이 일어났다.

설 명절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엽기적인 그녀”를 보았다. 2001년 영화인데 그 때 영화관에서 못보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었는데 스토리도 가물가물하고 프로젝터로 가족이 함께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이야기가 새로웠고 개봉한 지 제법 되었지만 여전히 촌스럽지 않고 재미있었다. 가끔씩 계속해서 보고 싶은 영화다. 지난달에 본 “미녀는 괴로워”도 마찬가지다. 미션임파서블 같은 영화가 스케일이 크고 화려하기는 하지만 평생을 두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인간미 넘치면서 가볍게 웃을 수 있고 약간의 감동도 있는 영화인 것 같다.

토요일에는 아이들은 집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놓아두고 아내와 함께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램프 더 테이블”이라는 레스토랑 겸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셨다. 춘천에서 유명한 “라뜰리에 김가네 빵공장”을 하는 사장님이 성처럼 멋있지만 사진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인수하여 오픈한 것이다. 사진관을 하기 전에 돈가스 같은 음식을 하던 곳이었을 때 한 번 가보았는데 반지하의 1층에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질 정도로 습기가 많고 곰팡이 냄새가 나서 두 번 다시 가지 않았었다. 건물이 십여 년이 지난 이제야 제대로 주인을 만난 느낌이다. 건물 안팎의 조명이 멋있고,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근사한데 테이블이 낡고 싸구려 같아서 왜 이리 테이블에 돈을 쓰지 않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층에도 내려가 보았는데 잡동사니들이 가득해서 조금 산만했지만 습한 느낌은 없었다. 조만간 사람들로 북적일 것 같은 곳이다.

일요일에는 어머님이 계신 인천에 가서 하루 자고 차례를 지내고 월요일 원주로 왔다. 몇 년 전까지는 일곱 시간씩 걸려서 인천에서 바로 처가가 있는 금산으로 갔었는데 이제는 네 시간 정도 걸려서 원주로 와서 잔 다음에 금산으로 간다. 운전하는 것도 그렇고 집에서 자는 것이 그만큼 편하다. 갈 때는 아침을 먹을 겸 덕평휴게소에 들렀는데 원숭이해 이벤트로 뽑기를 했다. 당일 구매한 영수증이 3만원이 넘으면 뽑기를 할 수 있어서 시원이에게 젤리를 사주는 인심을 쓰고 편의점에서 각자가 과자와 음료수를 골랐는데 밥값을 합쳐서 기막히게 3만 30원이었다. 이런 이벤트에는 손발이 척척 맞는 우리 가족이다. 원숭이띠인 시원이가 뽑았는데 국밥 한 그릇이 걸렸다. 그것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올 때도 들러야 한다. 구경거리도 많고 재미있는 휴게소다.

인천에 도착하여 큰 집에서 형수님들이 부친 부침개를 먹고 롯데 아울렛에 갔다. 거기서 시원이는 1000조각 퍼즐을 사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매장 아저씨가 시원이를 붙잡고 큰 지도를 펼치면서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설명도 해주셨는데 거기에 반해서 책 십여 권과 그 지도를 샀다. 꽤 박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도 하단에 그 분의 휴대폰 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본인이 지도를 만들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지도는 길이가 2미터 15센티미터나 되었지만 차 뒷좌석에서 트렁크로 뚫린 구멍으로 밀어 넣으니 가져오는데 별로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 거기서 신세계백화점으로 가서 아내와 시훈이는 옷을 구경하러 돌아다니고 나와 시원이는 영풍문고에서 책을 읽었다. 원래는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워낙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그냥 서점에서 줄곧 책을 읽었다. 우연히 “18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한 12가지”라는 책을 발견해서 반쯤 읽고는 사가지고 나와서 계속 읽었다. 백화점에 다니던 일본 직장인이 42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깨달은 이야기를 십 년 정도가 지나서 쓴 것이다. 회사를 나와서 자기가 벌인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 인간관계, 가족과 취미, 공부(영어, 프로그래밍,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결국 회사가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면 지은이처럼 나가서 다른 일을 찾는 길도 있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 뿐이다. 현명해야 하고 열정과 끈기도 중요하지만,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너무 희생할 이유는 없다. 아무튼 명절 연휴처럼 어중간할 때 책을 한 권 읽은 것은 뿌듯한 수확이다.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관의 카페에서 디저트로 아몬드 스틱을 먹고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설 전날의 즐거운 나들이를 마무리 했다.

차례를 지내고 차이나타운이나 소래포구, 송도를 들를까도 싶었으나 오후에 차가 막히고 눈도 온다는 뉴스에 바로 원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길이 막혔지만 차 안에서 조용필의 “바운스”, “꿈”과 같은 노래를 들으며 흥겹게 점심 무렵 덕평휴게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갈 때 봐두었던 시훈이 코트를 샀다. 그리고는 그 영수증으로 뽑기를 세 번 했다. 빨간 원숭이저금통, 원두커피 두 잔, 씨앗 호떡을 뽑았고 덕분에 전날 받은 쿠폰과 함께 점심과 디저트를 해결하였다.

휴게소에서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원주에 도착할 무렵에는 제법 많이 내렸다. 집에 오후 3시 반쯤 들어와서 거실 베란다 밖을 보니 눈 내리는 풍경이 어느 카페에서보다 멋있었다. 역시 집이 좋다. 집을 잘 꾸며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행 끝의 편안한 기분으로 모나카와 강정을 먹으며 생강차를 마셨다. 티타임 후에 나는 잠시 낮잠을 잤고, 시훈이는 공부를 했고, 시원이는 거실 바닥에서 1000조각 퍼즐과 씨름을 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설날 특집 듀엣가요제를 보고, 전날 녹화 해놓은 1박2일도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 달지를 두고 한참이나 고심했던 세계지도를 거실 소파 쪽 벽에 달았다. 지도가 너무 커서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고 달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큰 지도를 산 것에 대해 살짝 후회를 할 뻔도 하였으나 달아놓고 보니 매우 만족스럽다. 큰 스케일의 지도를 바라보면서 씽크빅, 씽크디퍼런트와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생각의 크기와 독창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딱 필요한 말이긴 한데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인가? 아이들이 그 큰 지도를 보면서 큰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넓은 세계에 적용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생선 장사를 하시는 어머님에게 동아세계대백과사전을 사달라고 말했고 어머님은 순순히 사주셨다. 나는 그 백과사전에서 세계 각 나라의 지도만을 모두 오려서 스테이플러로 찍어 보관했다. 아마도 세계에 관한 호기심과 동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지도들은 분실되었고, 백과사전도 조카들에게 전해진 다음에 사라졌다. 나는 그 뒤로 30년 쯤 지나서 인터넷에서 그 백과사전을 중고로 구매하였고, 지금 32권의 백과사전은 내 서재 가장 높은 선반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훨씬 빠르고 풍부한 정보를 찾아준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종이로 된 백과사전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백과사전이 꽂혀 있는 책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어린 시절에 내가 꿈꿨던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심이 그 책 속에 여전히 들어 있다.

화요일에는 금산에 가서 장모님이 차려주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차리시는 동안에 셀프세차장에서 차를 닦았다. 한 시간 정도 땀이 날 정도로 차를 닦으니 몸도 가뿐해지고 깨끗한 차를 보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점심을 먹고 한잠 자고 귀경하는 차들로 막히는 고속도로를 피해서 처음 가보는 국도를 따라 올라왔다. 낮잠을 잔 덕분에 컨디션은 괜찮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서 꼬불꼬불한 길을 운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길은 뚫려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저녁 8시20분쯤에 원주에 도착해서 너무 늦지 않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짜장면이나 라면 등을 먹을까 했지만 내가 고집해서 “램프 더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특급 식당 출신의 셰프가 요리한 해산물리조또, 크림스파게티, 오징어샐러드, 대관식샐러드가 맛있었다. 시훈이는 식사 후에 시원이를 데리고 가서는 초콜릿 열두 개와 레몬 모히또, 블루베리 모히또를 사가지고 왔다. 적절한 타이밍에 기분을 낼지 아는 아들이다. 일하시는 분들도 친절해서 시훈이가 초콜릿을 고를 때 도움을 주고 프랑스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는 설명도 해주신 모양이다. 식사가 끝나고는 젊고 멋있는 직원이 우리가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를 데리고 식당 여기저기와 1층까지 내려가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식탁이 싸구려 같지만 프랑스에서 가져온 골동품이라는 것, 친근한 느낌을 주려고 식당 바닥에 일부러 오래된 마루를 깔았다는 것, 1층 카페에는 오래된 프랑스 의자를 갖다 놓았지만 식사하는 곳에서는 편하게 하라고 요즘 의자를 놓았다는 것, 아무렇게나 놓은 문짝도 150년 된 프랑스 골동품이라는 것,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 현지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 경매를 위해 이태원 등에 자주 간다는 것 등등을 알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여러 가지가 신비롭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시훈이에게 식사를 하면서 이곳을 고집해서 온 이유를 설명해주었었다. 바로 이런 것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뿐만이 아니라 디자인과 인테리어, 서비스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밥만 먹을 것이 아니라 물어보면서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마치 가이드처럼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주었던 분이 가족사진까지 찍어주고, 아내가 혹시 빵을 타임세일 하느냐고 물어보니 타임세일은 하지 않지만 그냥 주겠다며 빵을 골고루 담는 것에서 결정타와 같은 감동을 받았다. 단골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곳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네이버의 매거진캐스트에서 “거기, 라디오가 있다”라는 글을 읽었다. 라디오작가로 20년째 매일 같이 글 쓰는 일을 하는 정현주씨의 인터뷰였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어떻게 이겨내고 꼬박꼬박 정해진 시간에 전파를 타야 하는 라디오 원고를 쓰는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밤 방송을 끝내고 새벽 3시에 들어와도 자기 전에 운율을 배우기 위해 꼭 시집을 읽었다는 말에서 그 치열함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함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며칠 전부터 머리에 맴돌던 화두였다. 위대한 작업이란 무엇인가? 지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놓여 있는 작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날 것이다. 내가 이번 연휴에 만났던 영화, 휴게소, 지도, 책, 음악, 방송, 레스토랑, 서비스, 인터뷰는 별처럼 빛나고 있다. 나는 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 지를.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말 못할 고통이 있었을 지를. 적당히 해서는 항상 제자리에서 조금씩 쇠퇴할 뿐이다. 방향을 어떻게 잡든, 운이 좋든 잘못 택하든, 우리는 다시 그 선택이 일어났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때의 선택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만 한 번의 큰 사건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생을 그르치는 경우는 대부분 하루하루의 자잘한 순간에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가야할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고 목표가 중요하다. 좋은 습관은 위대한 작업을 방해하는 심리적인 저항을 수월하게 넘게 해준다. 좋은 목표는 마치 식물들이 햇빛을 향해 조끔씩 뻗어나가듯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준다. 만약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 당장 깊은 생각을 하라. 종이를 한 장 앞에 놓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끄적거려도 좋고, 햇볕을 쬐거나, 산책을 나가서 걸으면서 생각을 해도 좋다. 어떤 생각을 해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위대한 작업”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이 넓은 세계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8년의 방황 끝에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깊은 생각을 하고 방향을 잡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기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그것이 넓은 세계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노력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살짝 시작하기만 해도 된다. 내키지 않는다면 낮 동안 계속 놀면서 빈둥거리다가 잠들기 직전에 조금만 움직여도 된다. 어차피 한번 시작하면 꽤 오래 지속될 것이고, 불면의 밤을 보낼 것이며, 인생의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될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건강을 챙기고, 햇볕을 실컷 쬐고, 밝은 생각을 해야 한다. 시끌벅적하게 여럿이 가는 것도 즐겁지만 때로는 혼자 음미하면서 가는 것도 맛이 깊다. 즐거움은 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가는 길에 우연히 발밑에서 발견한 잣나무 솔방울에 있다. 외로운 위대한 작업에 대한 보상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박형종 2016-02-10 (수) 20:55 글 1095   답글 프린트 2   ▷3901 폴더 일상[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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