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이의 질문 요즘 시원이가 궁금할 게 많은 나이인가 보다. 주로 식탁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타고 움직일 때 질문을 한다. 예전에도 질문이 많기는 했지만 요즘 WHY?와 같은 책을 즐겨 읽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냉장고는 어떻게 음식을 차갑게 만드나?
-사람은 원숭이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나? 그런데 왜 원숭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나?
-왜 공룡은 멸망했나?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이 생겨났는가?
-과자는 틀로 만드는가? 소시지도 틀로 만드는가? 크랜베리도 틀로 만드는가?
-왜 현대백화점에는 마트가 없는지?
-여주아울렛은 누구 것인가?
-물류창고가 무엇인가?
나는 얄팍한 지식으로 대답하기에 바쁘다. 시훈이도 아는 질문이 나오면 오빠의 해박함을 보여주기 위해 말이 급해진다. 가끔 자기가 모르는 질문을 하면 "뭐 그런 시시한 질문을 하니!"라며 구박한다. 그런 시훈이도 유치원 다닐 때 내게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냐고 질문을 했었다. 그 대답은 참 어려웠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어떻게 유치원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에 시시한 질문은 없다. 답을 모르는 질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진한 질문은 항상 나를 겸손하게 한다. 내가 대학원에서 물리수업을 들 때 강주상교수님은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을 즐거워 하셨다. 무슨 질문을 해도 껄껄 웃으시며 친절히 대답해주셨다. 나는 매 수업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언제나 최소한 질문 한 가지는 하려고 노력했다. 수업시간 내내 "오늘은 무슨 질문을 하지?"하며 고민에 빠진 적도 있다. 그 덕분에 "질문?"이라고 말하시면서 계단식 강의실에 앉은 100명도 넘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 나는 언제나 강의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손을 들고 질문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다른 학생들은 내 질문 때문에 수업 시간이 조금 더 늦게 끝나는 것에 대해 원망을 했을 것 같다. 그 때 내가 눈치가 부족했었다는 것 같다.
요즘 나는 수업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더욱 좋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나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질문을 받는 것을 좋아할 뿐만이 아니라 질문하면 칭찬스티커와 같은 별을 주고 수업이 끝나면 그 내용을 기록해두었다가 나중에 학교생활기록부에 요약해서 쓰거나 추천서를 쓸 때 언급하기도 한다. 질문을 하거나 답을 잘 해서 한 학기에 50개가 넘는 별을 받는 학생도 있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내가 강주상교수님에게 했던 질문을 받을 때이다. 그 때 내가 그 질문을 하기를 잘 했었군 하며 즐거운 마음이 든다.
좋은 질문은 위대한 지식을 위한 첫 걸음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의문을 가져라. 그리고 질문해라. 교육의 본질은 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질문이 없는 교실은 죽은 것이다.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늙는다. 가끔은 어린 아이처럼 시시한 것에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라.
요즘 내가 즐겨 하는 질문은 나 스스로에 대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보다 행복할까? 답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질문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보다 더 시시한 질문도 한다. 어떻게 하면 누가 어떤 질문을 했는가를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수업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고 기록할 수 있을까?
질문은 삶에 적당한 긴장을 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즐거움도 준다. 사람들이 퀴즈나 퍼즐, 낱말 맞추기, 추리 등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 심리일 것이다. 나는 한동안 바다소의 "오늘의 문제"에 파묻혀서 살아볼 생각이다.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하다. 물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제 재미있는 여행을 위한 준비는 끝났고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