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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비

초등학교 때 언제부턴가 비가 오면 나는 우산을 한 개는 쓰고, 한 개는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렇게 생선 장사를 하고 밤늦게 오는 엄마의 마중을 나갔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게 좋았다. 우산을 펴서 바닥에 내려놓고 그 속에 들어가 앉아 비를 피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이번 버스에서도 내리지 않았다. 다음 버스에는 타고 계실까하는 기대는 번번이 어긋났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고, 두 시간쯤이 지루하게 지난다. 깜깜한 밤에 버스 몇 십대가 지나고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영영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할 때 저 멀리 세상에서 단 한대 밖에 없는 버스에서 엄마가 내렸다. 비는 그렇게 나와 엄마를 맺어주었다.

비는 단조로운 중고등학교 교실 창문에도 찾아왔다. 따분한 수업이 끝도 없이 이어질 때, 비는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시끄럽게 창문을 두드리며 교실 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이 보였다.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몇 개 모여서 더 커진 물방울이 되고 더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흘렀다. 창문의 빗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명하지만 흥미롭지 않고, 뿌옇지만 기대를 갖게 하는 그런 세상의 경계에서 나는 한참이나 맴돌고 있었다.

눈은 겨울의 별미였다. 아랫동네와 윗동네 아이들 사이에 집단으로 눈싸움이 붙으면 어느 틈엔가 키보다 높은 성이 우리를 빙 둘러 있었고, 누구는 눈을 뭉쳐 포탄을 만들고, 누구는 그것을 열심히 던졌다. 손발이 꽁꽁 얼고,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몰랐다. 밥 먹으러 들어오란 말도, 그만 놀고 공부하란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장판이 까맣게 탈 정도로 장작을 땐 방에서 이불을 덮고 만화책을 보다가 "찹쌀떡 사려, 메밀묵 사려"하는 그 당시 가장 흔했던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의 추운 목소리를 듣고 밖에 나와 보면 까맣게 눈이 내리고 함박눈이 쌓여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과 수요일 많은 눈이 내렸고, 오늘 금요일에도 눈이 내린단다. 그제 뉴스를 보니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 난 차들, 멈춰선 전철, 지각하는 사람들,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을 낸다는 이야기가 빼곡하다. 나도 오랜만에 텔레비전 뉴스를 켠 이유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눈은 잘못이 없다. 다음번에 나는 그런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내 차가 커브 길에서 미끄러져 보도블록을 들이받기도 하고 힘겹게 퇴근해보니 시원이는 깜깜한 저녁에 친구랑 아파트 공원에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세차게 부는 눈보라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도 춥고 힘들었는데, 고글까지 쓰고, 머리를 몸통에 올리기 위해 낑낑거렸다.

물은 어떤 때는 비가 되고 어떤 때는 눈이 되어 내 마음에 내린다. 비가 올 땐 우산을 쓰고 아이랑 불어난 물을 구경하며 걷고 싶다. 그 개울에 작은 종이배를 띄어 보낼 것이다. 눈이 올 땐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이른 아침이건 늦은 밤이건. 다음번에 그들이 다시 찾아올 때쯤 그것은 아련하고 포근한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박형종   2012-12-07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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