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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끝나가는 토요일 밤의 단상.

(2008.08.30)
 
한 여름 매미들이 요란하게 울더니만, 지금은 한결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들이 정겹네요. 뭔가 글을 쓰려다가도 쫓기는 마음에 포기하기를 여러번. 오늘도 그럴 뻔 했는데 서재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섞인 풀벌레들의 잔잔한 교향악이 조금 마음의 여유를 줍니다. 
 
개학하고 3일 동안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며, 진학실에 몰려드는 민원인들을 맞이했습니다. 수강신청에 대해 질문하는 신입생과 편입생, 자신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호소하는 2학년생들, 자기소개서를 놓고 한 두 시간씩 진이 빠지도록 씨름하는 고3들, 졸업 후 인사차 찾아온 졸업생들, 근심어린 표정으로 진학을 상담하시는 학부모님들, 여러 문서를 들고 찾아오시는 선생님들.  
 
저는 상담하는 동안 되도록 시간을 보지 않습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보니 많은 학생을 상대할 수 없어서 진학실 밖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스러울 따름입니다.
 
특히 수시 입시철이다보니 자기소개서를 쓰느라고 난리인데, 고등학생이 뭐 대단히 자기를 소개할 내용이 있기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굉장히 힘들어 하고 있지요. 그래서 써 갖고 오면 용타하고 친절하게 읽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깐에는 학원에 떠도는 성공한 수험생의 자기소개서들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고 내미는 글인데 온갖 머리를 다 짜냈다는 글도 제 눈에는 마냥 허전하기만 합니다.
 
 
마지막 남은 열기를 맹렬히 내뿜는 8월 30일 한 낮.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니 두 아이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아빠 오면 놀러나가도 좋다는 엄마의 말을 충실히 따라 초등학교 2학년의 시훈이는 인사만 하더니 옆 라인의 친구 동재네 집으로 놀러 갔습니다. 그리고는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 왔다는군요.
 
올 해 유치원에 들어간 시원이는 집에서 아빠와 놀기를 택한 모양입니다. 숨바꼭질하자고 졸라대어 이곳 저곳을 같이 뛰어나니다가,  내가 들려주는 엉뚱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숨넘어갈 듯 깔깔대며 끝까지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며 함께 춤도 추었고, 내가 전단지로 얼굴을 가리니 손으로 격파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나마 얼마남지 않은 아빠의 에너지를 순식간에 고갈시켰습니다. 낮잠을 자러 안방으로 들어가니 퍼즐소파 조각으로 마구 때립니다.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곧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잠에서 깨고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세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시원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여러 군데서 사진도 찍고, 비디오도 찍으며 모처럼 해질무렵의 온화한 공기를 즐겼습니다.
 
올 3월 지금의 집으로 이사와서 부쩍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자동차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아이 혼자 자전거를 타러 나가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되고, 원주천의 시원한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스트레스도 물을 따라 흘러가 버립니다.
 
이 글을 마치면 이 밤에도 산책을 나갈까 합니다. 가슴 높이까지 자라서 가을이 오기전 마지막 뜨거운 햇빛을 쬐려는 풀들과 시원이처럼 그 속에 꼭꼭 숨어서 나 찾아봐라 하는 풀벌레들과 그 사이를 헤집고 낮게 흐르는 개천과 이 모든 것의 이야기를 언제나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보는 별들 속으로..
박형종   2008-08-3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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